이한수 기자= 글 hslee@chosun.com
이태경 객원기자= 사진 ecaro@chosun.com
입력 : 2007.09.18 00:07
“용전 김철희 선생이시죠.”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도, 김형찬 고려대 교수(유가철학), 최연식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사상)도 그를 꼽았다. 경북 봉화의 유학자 권헌조(80)씨도 학문 높은 선비를 묻자 “서울에 사는 용전 선생의 학문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사거리에서 비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김철희(金喆熙·93) 옹이 사는 소박한 단층집이 있다. 일흔 넘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요즘은 근력이 떨어져서 잘 일어나질 못해.” 그는 앉은 채로 두 팔을 이용해 움직이면서 이불을 펴놓은 자신의 좁은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앉은뱅이 선비책상에는 초서(草書)로 휘갈긴 문집(文集)의 복사물이 수십 장 놓여있었다. 누군가 조상 문집의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일)를 부탁했다고 한다.
요즘도 후학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10명쯤 되나요? 얼마나 자주 오나요? 와서 무엇을 하나요? 하는 질문에 그는 “많이 찾아와.” “10명도 넘어.” “일주일에 빈 날이 없어.” “글 묻는 게 일이지” 하고 단문(短文)으로 답했다. 그는 3시간 넘은 인터뷰 시간 중 절반 이상은 대답 대신 자신의 문집을 읽었다. ‘천해정문고(天海亭文稿)’라는 제목을 단 문집은 그가 일흔 살 될 무렵인 1983년 후배·제자들이 한문으로 쓴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한문으로 빽빽이 적힌 580쪽짜리 문집은 한글로 번역하면 단행본 예닐곱 권은 될 것 같았다.
―호 ‘용전’은 어떤 뜻입니까?
“용 룡(龍), 밭 전(田)이야. ‘현룡재전’(見龍在田)에서 따왔지. 농사 지어먹고 살았으니까. 주역(周易)에 나와.” (‘주역’ 첫 대목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는 구절이 있다. 신성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아직 혼자의 역량으로 솔선해 나갈 수 없는 상태이니, 자신을 이끌어줄 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젊은 시절엔 어디 사셨습니까?
“안동 녹전면 서삼동에서 농사를 지었어. 여가(餘暇)에 글을 읽었어. 안동 본향에서는 진성 이씨가 대성(大姓)이지. 그 다음 순천 김씨, 광산 김씨 두 씨족이 많이 살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사셨습니까?
“10대째야.”
순천 김씨인 그의 선조는 10여 대째 안동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고향을 왜 떠나셨나요?
“여기 다 있어.” 그는 대답 대신 문집의 한 대목을 읽었다.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나 앞길이 막히는 때가 많았다. 입이 있으니 먹는 일을 폐할 수 없고, 몸뚱이가 있으니 옷을 물리칠 수 없었다”는 구절이다.
광복 직후 대전을 거쳐 50여 년 전 서울에 올라온 그는 평생 국사편찬위원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공문서와 ‘성호사설’ ‘삼봉집’ ‘계곡만필’ 등 문집들이 번역됐다. 1993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초서해독능력을 가진 인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만든 연수과정에서 초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초서독해의 1인자로 평가된다. “국편(국사편찬위원회)이고, 민추(민족문화추진회)고 내가 만든 거야.” 그는 두 기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방란(芳蘭·김병익)이라 호를 한 5촌 숙부인데, 보통 선비는 넘으셨지. 큰 선비였어.” 그는 18세 때까지 숙부에게 배운 뒤 “영남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